
상실의 시대로 처음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다. 그때는 다들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지하철을 탈라치면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는 누군가가 꼭 있었다. 어설프게 몸담고 있던 독서모임에서도 상실의 시대를 읽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읽게 됐다.
그닥 와닿지 않는 소설이었다. 바람이 낙엽을 끌어 골목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놓는 풍경같았다. 나는 그것보다는 비포 선라이즈 같은 찬란한 연애담이나 아니면 12 monkeys나 저수지의 개들 같은 강렬한 영화들이 더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또 읽고 싶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현재 내 책장에는 번역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들이 거의 다 구비되어 있다. 그의 저작물이 출간되면 어김없이 구입해서 책장의 짐을 늘린다. 스스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하는 짓을 보면 꽤 팬이다.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하루키의 글을 다시 잡은 것은 글쓰기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나는 글을 잘 써야 했는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선생이 필요했다. 롤모델을 찾다가 어느 라디오 pd의 개인 홈페이지에 발을 들였다. 그의 재기 넘치는 문장에 넋을 잃었는데, 그 라디오 pd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벤치마킹했다고 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하루키의 에세이를 주문했다. 확실히 그는 남다른 문장가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들을 모두 읽은 후, 그의 소설을 하나 둘 사들였다. 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빵가게 재습격. 현실과 어긋난 곳으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현실에서 정신차리게 되는 묘한 구조와 테마를 가졌다. 상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체취의 소설들이었다. 자꾸 그의 다른 저작들을 읽고 싶어졌다.
하루키의 데뷔 에피소드는 뜬금없다. 그는 서른에 첫 소설을 썼다. 어느 날, 야구장에 갔다가 갑자기 뭔가 쓰고 싶어진게 집필 동기다. 그 소설로 군조문학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운영하던 술집을 처분하고 본업작가가 되었다. 나는 그의 첫소설을 가장 늦게 읽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작년에 읽었다. 가장 하루키답다고 느꼈다. 모기장 열개를 덧댄듯한 흐릿한 풍경이 느리게 스쳐지나갔다. 상실의 시대가 겹쳐 보였다. 상실의 시대에 심드렁했었는데, 상실의 시대의 어머니격인 이 소설이 가장 하루키답다고 느껴졌다. 양을 쫓는 모험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도, 어둠의 저편도 모두 써낼 만한 작가의 데뷔작이었다. 아니면 내안의 뭔가가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그 느낌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 느낌은 대부분 잃어버렸거나 달라져 버렸다.
지금은 일본어 문고판으로 다시 읽고 있다. 읽는다기 보다는 겨우겨우 해석해내고 있다. 눈보다 전자사전 버튼 누르는 손이 더 바쁘다.
울고 싶을 때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법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